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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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는 2002년에 치러진 선거로, 만 20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에게 선거권이, 만 40세 이상에게 피선거권이 주어졌다. 주요 후보로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등이 있었으며, 새천년민주당은 국민 참여 경선을 통해 노무현을 후보로 선출했다. 선거 전 노무현과 정몽준은 단일화를 시도했으나 정몽준의 지지 철회로 인해 노무현과 이회창의 양자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다. 선거 결과 노무현이 이회창을 근소한 차이로 꺾고 당선되었으며, 이는 3김 시대 종식과 인터넷 정치 시대 개막을 알리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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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 |
---|---|
지도 정보 | |
![]() | |
![]() | |
선거 정보 | |
국가 | 대한민국 |
선거 종류 | 대통령 선거 |
이전 선거 | 199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997년 |
다음 선거 | 200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2007년 |
선거일 | 2002년 12월 19일 |
투표율 | 70.83% ( 9.82%p) |
후보 정보 | |
후보 1 | 노무현 |
소속 정당 1 | 새천년민주당 |
득표수 1 | 12,014,277 |
득표율 1 | 48.91% |
후보 2 | 이회창 |
소속 정당 2 | 한나라당 |
득표수 2 | 11,443,297 |
득표율 2 | 46.59% |
선거 결과 | |
당선인 | 노무현 |
당선 정당 | 새천년민주당 |
이전 대통령 | 김대중 |
이전 대통령 소속 정당 | 무소속 |
2. 선거 정보
2. 1. 선거권
만 20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은 선거권이 있었다. 즉, 1982년 12월 19일 이전에 태어난 사람은 투표를 할 자격이 있었다.2. 2. 피선거권
만 40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피선거권을 가졌다. 즉, 1962년 12월 19일 이전에 태어난 사람은 후보자가 될 자격이 있었다.3. 후보
wikitext
2002년 11월 27일과 28일은 후보자 등록일이었으며, 다음 7명이 입후보하였다.[13]
번호 | 정파 | 후보자명 | 약력 |
---|---|---|---|
1 | 한나라당 (한나라당) | 이회창 (이회창) | 전 장의 약력 참조 |
2 | 새천년민주당 (새천년민주당) 국민통합21 (국민통합21) | 노무현 (노무현) | 전 장의 약력 참조. 국민통합21은 투표 직전인 12월 18일에 지지를 철회함. |
3 | 하나로국민연합 (하나로국민연합) | 이한동 (이한동) | 69세. 경기도 출신. 전 국무총리.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후계 후보로 나섰으나 이회창에게 패배하고,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자민련에 합류하였다. 2001년 9월, 자민련이 새천년민주당과의 연립 정권을 해소한 후, 동당을 탈당하였다. |
4 |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 | 권영길 (권영길) | 62세. 경상남도 출신. 민주노동조합총연맹 초대 위원장으로 전회(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국민승리21”에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이 해 6월에 실시된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약진을 거두었다. |
5 | 사회당 (사회당) | 김영규 (김영규) | 56세. 인천광역시 출신. 대학교수에서 사회주의 운동가로 전향. 이 해 6월에 실시된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인천광역시 시장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
6 | 호국당 (호국당) | 김길수 (김길수) | 54세. 승려 |
7 | 무소속 (무소속) | 장세동 (장세동) | 66세. 12월 18일에 입후보를 사퇴함 |
3. 1. 새천년민주당
새천년민주당은 대한민국 정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참여경선을 2002년 3월 9일부터 4월 27일까지 실시하여 노무현 전 해양수산부 장관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10]경선에는 노무현,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김중권, 김근태, 유종근 7명이 출마했다.[8] 당 대의원을 대상으로 한 사전 여론조사에서는 이인제가 우세했지만, 3월 9일 제주도 경선을 시작으로 노사모의 활발한 활동에 힘입어 노무현이 초반부터 우세를 점했다. 이인제는 자신의 출신 지역인 충청도(대전, 충북, 충남)에서만 승리했다.
전국 11개 지역 예비선거가 끝난 시점에서 노무현과 이인제의 표 차는 1,016표까지 벌어졌고, 결국 이인제는 4월 17일 경선 사퇴를 발표했다. 김근태는 3월 12일, 유종근은 3월 14일, 한화갑은 3월 19일, 김중권은 3월 25일에 각각 사퇴했다.
당내 경선은 3월 초부터 4월 말까지 7주간 매 주말 전국 16개 시·도를 순회하며 진행되었고, 각 지역의 득표를 합산하여 서울 투표 종료 후 당 대회에서 당 후보를 결정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당원이 아닌 일반 국민도 ‘국민선거인단’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였고, 당내 경선 유권자 70,000명 중 절반이 국민선거인단으로 구성되었다. 국민선거인단은 응모한 20세 이상 국민 중 추첨으로 선발되었으며, 인터넷 투표를 통해서도 선출되었다. 투표 방식은 선호투표제가 채택되었고, 유권자는 전자투표로 투표했다.
최종적으로 노무현 후보가 17,577표(72.2%)를 득표하여 정동영 후보(6,767표, 27.8%)를 제치고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되었다.
경선 지역 | 노무현 | 정동영 | 이인제 | 김중권 | 한화갑 | 유종근 | 김근태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
제주도 | 125 | 18.6 | 110 | 16.4 | 172 | 25.6 | 55 | 8.2 | bgcolor="" |175 | bgcolor="" |26.1 | 18 | 2.7 | 16 | 2.4 |
울산 | bgcolor="" |298 | bgcolor="" |29.4 | 65 | 6.4 | 222 | 21.9 | 281 | 27.8 | 116 | 11.5 | 20 | 2.0 | 10 | 1.0 |
광주 | bgcolor="" |595 | bgcolor="" |37.9 | 54 | 3.4 | 491 | 31.3 | 148 | 9.4 | 280 | 17.9 | – | – | – | – |
대전 | 219 | 16.5 | 54 | 4.1 | bgcolor="" |894 | bgcolor="" |67.5 | 81 | 6.1 | 77 | 5.8 | – | – | – | – |
충남 | 277 | 14.2 | 39 | 2.0 | bgcolor="" |1,432 | bgcolor="" |73.7 | 196 | 10.1 | – | – | – | – | ||
강원 | bgcolor="" |630 | bgcolor="" |42.5 | 71 | 4.8 | 623 | 42.0 | 159 | 10.7 | – | – | – | – | ||
경남 | bgcolor="" |1,713 | bgcolor="" |72.2 | 191 | 8.1 | 468 | 19.7 | – | – | – | – | – | – | ||
전북 | bgcolor="" |756 | bgcolor="" |34.3 | 738 | 33.5 | 710 | 32.2 | – | – | – | – | – | – | ||
대구 | bgcolor="" |1,137 | bgcolor="" |62.3 | 181 | 9.9 | 506 | 27.7 | – | – | – | – | – | – | ||
인천 | bgcolor="" |1,022 | bgcolor="" |51.9 | 131 | 6.7 | 816 | 41.4 | – | – | – | – | – | – | ||
경북 | bgcolor="" |1,246 | bgcolor="" |59.4 | 183 | 8.7 | 668 | 31.9 | – | – | – | – | – | – | ||
충북 | 387 | 32.1 | 83 | 6.9 | bgcolor="" |734 | bgcolor="" |61.0 | – | – | – | – | – | – | ||
전남 | bgcolor="" |1,297 | bgcolor="" |62.0 | 340 | 16.3 | 454 | 21.7 | – | – | – | – | – | – | ||
부산 | bgcolor="" |1,328 | bgcolor="" |62.5 | 796 | 37.5 | – | – | – | – | – | – | – | – | ||
경기 | 1,191 | 45.5 | bgcolor="" |1,426 | bgcolor="" |54.5 | – | – | – | – | – | – | – | – | ||
인터넷 투표 | bgcolor="" |1,423 | bgcolor="" |81.3 | 327 | 18.7 | – | – | – | – | – | – | – | – | ||
서울 | bgcolor="" |3,924 | bgcolor="" |66.5 | 1,978 | 33.5 | – | – | – | – | – | – | – | – | ||
합계 | bgcolor="" |17,577 | bgcolor="" |72.2 | 6,767 | 27.8 | 사퇴 | 사퇴 | 사퇴 | 사퇴 | 사퇴 |
3. 1. 1. 새천년민주당 경선 결과
새천년민주당은 2002년 3월 9일부터 4월 27일까지 한국 정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 참여 경선을 실시하여 노무현 전 해양수산부 장관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10]경선 지역 | 노무현 | 정동영 | 이인제 | 김중권 | 한화갑 | 유종근 | 김근태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
제주도 | 125 | 18.6 | 110 | 16.4 | 172 | 25.6 | 55 | 8.2 | bgcolor="" |175 | bgcolor="" |26.1 | 18 | 2.7 | 16 | 2.4 |
울산 | bgcolor="" |298 | bgcolor="" |29.4 | 65 | 6.4 | 222 | 21.9 | 281 | 27.8 | 116 | 11.5 | 20 | 2.0 | 10 | 1.0 |
광주 | bgcolor="" |595 | bgcolor="" |37.9 | 54 | 3.4 | 491 | 31.3 | 148 | 9.4 | 280 | 17.9 | – | – | – | – |
대전 | 219 | 16.5 | 54 | 4.1 | bgcolor="" |894 | bgcolor="" |67.5 | 81 | 6.1 | 77 | 5.8 | – | – | – | – |
충남 | 277 | 14.2 | 39 | 2.0 | bgcolor="" |1,432 | bgcolor="" |73.7 | 196 | 10.1 | – | – | – | – | ||
강원 | bgcolor="" |630 | bgcolor="" |42.5 | 71 | 4.8 | 623 | 42.0 | 159 | 10.7 | – | – | – | – | ||
경남 | bgcolor="" |1,713 | bgcolor="" |72.2 | 191 | 8.1 | 468 | 19.7 | – | – | – | – | – | – | ||
전북 | bgcolor="" |756 | bgcolor="" |34.3 | 738 | 33.5 | 710 | 32.2 | – | – | – | – | – | – | ||
대구 | bgcolor="" |1,137 | bgcolor="" |62.3 | 181 | 9.9 | 506 | 27.7 | – | – | – | – | – | – | ||
인천 | bgcolor="" |1,022 | bgcolor="" |51.9 | 131 | 6.7 | 816 | 41.4 | – | – | – | – | – | – | ||
경북 | bgcolor="" |1,246 | bgcolor="" |59.4 | 183 | 8.7 | 668 | 31.9 | – | – | – | – | – | – | ||
충북 | 387 | 32.1 | 83 | 6.9 | bgcolor="" |734 | bgcolor="" |61.0 | – | – | – | – | – | – | ||
전남 | bgcolor="" |1,297 | bgcolor="" |62.0 | 340 | 16.3 | 454 | 21.7 | – | – | – | – | – | – | ||
부산 | bgcolor="" |1,328 | bgcolor="" |62.5 | 796 | 37.5 | – | – | – | – | – | – | – | – | ||
경기 | 1,191 | 45.5 | bgcolor="" |1,426 | bgcolor="" |54.5 | – | – | – | – | – | – | – | – | ||
인터넷 투표 | bgcolor="" |1,423 | bgcolor="" |81.3 | 327 | 18.7 | – | – | – | – | – | – | – | – | ||
서울 | bgcolor="" |3,924 | bgcolor="" |66.5 | 1,978 | 33.5 | – | – | – | – | – | – | – | – | ||
합계 | bgcolor="" |17,577 | bgcolor="" |72.2 | 6,767 | 27.8 | 사퇴 | 사퇴 | 사퇴 | 사퇴 | 사퇴 |
당내 경선은 3월 초부터 4월 말까지 7주간 매 주말 전국 16개 시·도를 순회하며 진행되었고, 각 지역의 득표를 합산하여 서울 투표 종료 후 당 대회에서 당 후보를 결정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당원이 아닌 일반 국민도 ‘국민선거인단’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였고, 당내 경선 유권자 70,000명 중 절반이 국민선거인단으로 구성되었다. 국민선거인단은 응모한 20세 이상 국민 중 추첨으로 선발되었으며, 인터넷 투표를 통해서도 선출되었다. 투표 방식은 선호투표제가 채택되었고, 유권자는 전자투표로 투표했다.
2월 22일과 23일 양일간 대통령 후보 경선 후보 등록 결과, 노무현,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김중권, 김근태, 유종근 7명이 출마했다.[8]
당 대의원을 대상으로 한 사전 여론조사에서는 이인제가 우세했지만, 3월 9일 제주도를 시작으로 진행된 예비선거에서는 노사모의 활발한 활동에 힘입어 노무현이 초반부터 우세를 점했다. 이인제는 출신 지역인 충청도(대전, 충북, 충남)에서만 승리하는 데 그쳤다. 전국 11개 지역 예비선거가 끝난 시점에서 노무현과 이인제의 표 차는 1,016표까지 벌어졌고, 이인제는 4월 17일 당내 경선 사퇴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다른 후보들 역시 김근태는 3월 12일, 유종근은 3월 14일, 한화갑은 3월 19일, 김중권은 3월 25일에 각각 사퇴했다.
최종적으로 노무현 후보가 17,568표(72.2%)를 득표하여 정동영 후보(6,767표, 27.8%)를 제치고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되었다.
3. 2. 한나라당
한나라당은 2002년 4월 13일부터 5월 9일까지 국민 참여 경선을 실시하여 이회창 전 당 총재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11][12] 이회창 후보는 경선에서 69.0%의 지지율을 얻어 다른 후보들을 압도했다.경선에는 이회창 전 총리, 최병렬 서울 지역 국회의원, 이부영 서울 지역 국회의원, 이상희 전 과학기술부 장관이 참여했다.[2]
경선 결과는 다음과 같다.
지역 | 이회창 | 최병렬 | 이부영 | 이상희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
인천 | bgcolor="" | | bgcolor="" | | 79 | 5.6 | 201 | 14.3 | 10 | 0.7 |
울산 | bgcolor="" | | bgcolor="" | | 206 | 27.2 | 73 | 9.7 | 31 | 4.1 |
제주 | bgcolor="" | | bgcolor="" | | 65 | 13.2 | 48 | 12.1 | 18 | 2.2 |
강원 | bgcolor="" | | bgcolor="" | | 101 | 9.1 | 71 | 6.4 | 44 | 4.0 |
경상북도 및 대구 | bgcolor="" | | bgcolor="" | | 427 | 11.4 | 133 | 3.5 | 54 | 1.4 |
전라북도 | bgcolor="" | | bgcolor="" | | 117 | 12.6 | 278 | 29.9 | 31 | 3.3 |
경상남도 및 부산 | bgcolor="" | | bgcolor="" | | 934 | 22.6 | 197 | 4.8 | 103 | 2.5 |
충청남도 및 대전 | bgcolor="" | | bgcolor="" | | 153 | 7.8 | 124 | 6.3 | 45 | 2.3 |
전라남도 및 광주 | bgcolor="" | | bgcolor="" | | 368 | 17.9 | 512 | 24.9 | 67 | 3.3 |
경기 | bgcolor="" | | bgcolor="" | | 424 | 12.3 | 486 | 14.1 | 81 | 2.3 |
충청북도 | bgcolor="" | | bgcolor="" | | 152 | 18.6 | 60 | 7.3 | 15 | 1.8 |
서울 | bgcolor="" | | bgcolor="" | | 1,668 | 34.5 | 743 | 15.3 | 109 | 2.3 |
합계 | bgcolor="" | | bgcolor="" | | 4,694 | 18.3 | 2,926 | 11.4 | 608 | 2.4 |
한나라당은 1월 22일 '선택 2002 준비위원회' 회의에서 경선에 국민 참여 방식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 후보 경선 유권자 50,000명 중 절반을 국민 선거인단으로 구성하고, 1인 1표제 전자투표를 도입했다. 4월 4일과 5일에 후보 등록을 진행하여 총 4명의 후보가 등록했다. 전국 12곳에서 투표가 진행되었으며, 5월 10일 한나라당 당 대회에서 이회창 후보가 최종 후보로 확정되었다.
3. 3.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은 2002년 9월 8일 당원 투표를 통해 권영길 당 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3] 권영길 후보는 민주노동조합총연맹 초대 위원장을 지냈으며, 1997년 대선에서는 '국민승리21'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한 바 있다.[13]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약진을 거두었다.3. 4. 국민통합21
국민통합21은 2002년 11월 5일 창당대회를 열고 정몽준 의원을 당 대표 및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14] 정몽준은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서 2002년 FIFA 월드컵 개최권 획득에 기여하며 인지도가 높아져 대통령 선거 여론조사에 등장하기 시작했다.[5]9월에 공식적으로 대선 운동을 시작한 정몽준은 많은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을 앞질렀으며 이회창과도 근소한 차이를 보였다. 노무현의 후보 지명에 불만을 가진 많은 민주당 정치인들이 정몽준의 캠페인에 합류했다. 그러나 노무현과 정몽준이 모두 출마할 경우 이회창이 쉽게 승리할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두 진영은 힘을 합치기로 결정했다.
두 진영은 서로 다른 여론조사 기관이 실시하는 두 차례의 여론조사를 통해 단일 후보를 선출하기로 합의했다. 단일 후보가 되려면 두 여론조사에서 모두 승리해야 했고, 그렇지 않을 경우 2차 여론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11월 24일에 실시된 두 차례의 여론조사 중 리서치앤리서치(Research and Research)의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이 정몽준을 누르고 승리했다.
결과적으로 정몽준은 후보직을 사퇴하고 노무현을 지지했다.[6] 그러나 정몽준은 선거 전날 밤, 노무현이 정책 결정에 자신을 포함시키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느끼면서 지지를 철회했다.[7]
3. 5. 기타 후보
wikitext2002년 11월 27일과 28일은 후보자 등록일이었으며, 다음 7명이 입후보하였다.[13]
번호 | 정파 | 후보자명 | 약력 |
---|---|---|---|
3 | 하나로국민연합 (하나로국민연합) | 이한동 (이한동) | 69세. 경기도 출신. 전 국무총리.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후계 후보로 나섰으나 이회창에게 패배하고,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자민련에 합류하였다. 2001년 9월, 자민련이 새천년민주당과의 연립 정권을 해소한 후, 동당을 탈당하였다. |
5 | 사회당 (사회당) | 김영규 (김영규) | 56세. 인천광역시 출신. 대학교수에서 사회주의 운동가로 전향. 이 해 6월에 실시된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인천광역시 시장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
6 | 호국당 (호국당) | 김길수 (김길수) | 54세. 승려 |
7 | 무소속 (무소속) | 장세동 (장세동) | 66세. 12월 18일에 입후보를 사퇴함 |
하나로국민연합은 11월 15일 재적 대의원 8,500명 중 8,125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대회를 열고 이한동 전 자유민주연합 총재를 당 대표 및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13]
사회당은 2002년 10월 27일 전당대회를 열고 김영규 전 인하대학교 교수를 당 대표 및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15] 김영규 후보는 대의원 찬반투표 결과 전체 투표수의 95%를 득표하였다.[16]
국태민안호국당은 11월 25일 재적 대의원 645명 중 539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대회를 열고 김길수 법륜사 주지를 당 총재 및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13]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은 2002년 10월 21일 무소속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다.[20] 그러나 12월 18일 당선 가능성이 없다며 사퇴를 선언하였다.[21]
1% 미만 득표 후보별 지역별 득표율 분포
지역 | 이한동 | 김길수 | 김영규 |
---|---|---|---|
bgcolor="" | | bgcolor="" | | ||
서울 | 12,724 | 6,437 | 4,706 |
부산 | 2,148 | 2,064 | 1,380 |
대구 | 1,699 | 1,317 | 810 |
인천 | 3,600 | 1,978 | 1,612 |
광주 | 803 | 1,014 | 305 |
대전 | 1,157 | 1,408 | 747 |
울산 | 997 | 716 | 502 |
경기 | 26,072 | 8,085 | 4,119 |
강원 | 3,406 | 2,713 | 969 |
충북 | 3,205 | 2,610 | 949 |
충남 | 4,973 | 4,322 | 1,303 |
전북 | 2,505 | 5,187 | 817 |
전남 | 2,830 | 6,707 | 988 |
경북 | 3,332 | 2,936 | 1,344 |
경남 | 2,832 | 2,629 | 1,224 |
제주 | 744 | 981 | 288 |
합계 | 74,027 | 51,104 | 22,063 |
출처: [http://info.nec.go.kr/ 중앙선거관리위원회] |
3. 5. 1. 사회당
사회당은 2002년 10월 27일 전당대회를 열고 김영규 전 인하대학교 교수를 당 대표 및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15] 김영규 후보는 대의원 찬반투표 결과 전체 투표수의 95%를 득표하였다.[16]지역 | 김영규 |
---|---|
bgcolor="" | | |
서울 | 4,706 |
부산 | 1,380 |
대구 | 810 |
인천 | 1,612 |
광주 | 305 |
대전 | 747 |
울산 | 502 |
경기 | 4,119 |
강원 | 969 |
충북 | 949 |
충남 | 1,303 |
전북 | 817 |
전남 | 988 |
경북 | 1,344 |
경남 | 1,224 |
제주 | 288 |
합계 | 22,063 |
출처: [http://info.nec.go.kr/ 중앙선거관리위원회] |
3. 5. 2. 하나로국민연합
하나로국민연합은 11월 15일 재적 대의원 8,500명 중 8,125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대회를 열고 이한동 전 자유민주연합 총재를 당 대표 및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13] 이한동 후보는 경기도 출신으로, 69세였다. 전 국무총리를 역임하였으며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후계 후보로 나섰으나 이회창에게 패배하고,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자민련에 합류하였다. 2001년 9월, 자민련이 새천년민주당과의 연립 정권을 해소한 후, 자민련을 탈당하였다.3. 5. 3. 국태민안호국당
호국당은 11월 25일 재적 대의원 645명 중 539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대회를 열고 김길수 법륜사 주지를 당 총재 및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였다.[13] 김길수는 54세로 승려였다.지역 | 이한동 | 김길수 | 김영규 |
---|---|---|---|
bgcolor="" | | bgcolor="" | | ||
서울 | 12,724 | 6,437 | 4,706 |
부산 | 2,148 | 2,064 | 1,380 |
대구 | 1,699 | 1,317 | 810 |
인천 | 3,600 | 1,978 | 1,612 |
광주 | 803 | 1,014 | 305 |
대전 | 1,157 | 1,408 | 747 |
울산 | 997 | 716 | 502 |
경기 | 26,072 | 8,085 | 4,119 |
강원 | 3,406 | 2,713 | 969 |
충북 | 3,205 | 2,610 | 949 |
충남 | 4,973 | 4,322 | 1,303 |
전북 | 2,505 | 5,187 | 817 |
전남 | 2,830 | 6,707 | 988 |
경북 | 3,332 | 2,936 | 1,344 |
경남 | 2,832 | 2,629 | 1,224 |
제주 | 744 | 981 | 288 |
합계 | 74,027 | 51,104 | 22,063 |
출처: [http://info.nec.go.kr/ 중앙선거관리위원회] |
3. 5. 4. 무소속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은 2002년 10월 21일 무소속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다.[20] 그러나 장세동 후보는 12월 18일 당선 가능성이 없다며 사퇴를 선언하였다.[21]4. 경과
4. 1. 선거 전 상황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의 양자 대결 구도로 진행되어, 제7대 대선 이후 최초로 양자 구도로 치러진 대선이었다. 이회창 후보는 한나라당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던 반면, 노무현 후보는 당내 기반이 약해 끊임없이 공격을 받고 있었다.이러한 상황에서 이회창의 당선이 유력시되었으나, 제15대 대선과 마찬가지로 아들 병역기피 의혹에 시달리고, '노풍'을 일으킨 노무현 후보로 인해 승패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노무현 후보는 정몽준 통합21 후보와 단일화에 성공하여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김대중 대통령의 새천년민주당(NCNP)은 2000년 새천년민주당(MDP)으로 재창당했지만, 한나라당(GNP)에 2000년 총선과 2002년 지방선거에서 모두 패배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4] 당시 한나라당 대표이자 유력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은 여론조사에서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었다.[4]
양주 고속도로 사건으로 인한 반미 감정은 미국 친화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선호하는 후보로 인식되었던 이회창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4]
4. 2. 민주당 후보 재신임
5월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인 김홍업과 김홍걸의 비리가 불거지며 민주당의 지지율이 하락함과 더불어, 노무현의 지지율도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에 노무현은 6.13 지방선거에서 영남권 광역 단체장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할 경우 재신임을 받겠다고 공약했다.선거 결과 새천년민주당은 호남과 제주의 광역단체장만 당선되는 등 참패를 기록했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 대로 후보 재신임을 물었고, 민주당 당무회의는 만장일치로 재신임을 의결했다. 민주당 내 최대 계파 모임인 중도개혁 포럼은 이를 인정할 수 없다며 ‘후보·지도부 즉각 사퇴론’을 주장했다.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이인제 등 민주당 내 반노무현 세력의 후보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4. 3. 정몽준 의원 출마
대한축구협회장이던 정몽준 무소속 의원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유치해내고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국민들 사이에 선풍적 인기를 얻어 유력 대권 주자가 되었다.[26] 정몽준이 대선에 출마하자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은 토막났고, 안 그래도 노무현 후보와 갈등이 있던 당내 상당수 의원들은 노무현 후보를 더 적극적으로 배척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이거니와 ‘후보 교체론’까지 나왔다. 노무현은 경쟁력이 없는 만큼 정몽준을 수혈해 대선 새판 짜기에 나서야 하지 않느냐는 정치공학적 판단이었다.10월 들어서는 아예 노무현의 낙마를 바라는 의원들이 탈당하여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후단협)를 만들고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는데, 이들은 노무현으로 후보 단일화가 되면 함께 할 수 없다고 발언하였고 정몽준 지지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26] 11월 19일 후단협은 정몽준에 대한 공개 지지를 밝혔으며,[27] 심지어 후단협 소속 의원이 정몽준 대표 측에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28] 후단협 해체 후 일부 의원은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12명은 민주당에 복당했다.[29]
그러던 10월 17일 김민석 전 민주당 최고위원이 민주당 탈당 및 통합21 합류를 선언했는데, 노무현에게 큰 타격이 되리라는 관측과 달리 오히려 이는 노무현 후보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노무현 후보에 대한 동정론이 불었고, 결국 답보 상태였던 그의 지지율은 20%대를 회복하고 후원금도 크게 늘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4. 4.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는 여론조사를 통해 단일 후보를 결정하기로 합의했다.[6] 단일화 방안으로는 국민 경선, 여론 조사, 협상 담판 등 3가지가 제시되었으나,[30][31] 통합21은 국민 경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11월 11일, 노무현 후보는 자신에게 불리한 것으로 여겨지던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제의했고,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일정 수준(30.4%)에 미달할 시 여론조사를 무효로 하자는 정몽준 측의 주장도 수용하였다.[32][33]여론조사 설문 내용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견주어 경쟁력 있는 단일후보로 노무현·정몽준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십니까"로 결정되었다.[34] 11월 22일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허용한 한 차례의 텔레비전 토론이 실시되었다.
11월 24일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리서치앤리서치 조사 결과 노무현 후보 46.8%, 정몽준 후보 42.2%로 노무현 후보가 승리했다.[35] 월드리서치 조사는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28.7%로 무효화 기준에 미달하여 무효 처리되었으나, 이 조사에서도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후보를 앞섰다.[35]
결과적으로 정몽준 후보는 후보직을 사퇴하고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다.[6] 노무현 후보는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계기로 지지율이 상승했다.[32][33]
하지만, 정몽준은 선거 전날 밤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7]
4. 5. 이인제와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 철회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2위를 한 이인제 전 민주당 최고위원은 2002년 12월 1일 민주당 탈당을 선언하고, 이틀 뒤인 12월 3일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김종필 총재의 지명을 받아 총재 권한대행으로 취임하였다.[36] 이인제는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할 계획이었으나, 김종필 총재의 강력한 의지로 자민련은 12월 12일 당 차원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기로 선언하였다.[36] 다만 당원 및 당직자들의 개별적인 지지는 막지 않아, 이인제는 다수 자민련 의원들과 함께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고 이회창 후보 지원 활동에 나섰다.[36]정몽준은 2002년 FIFA 월드컵 개최권 획득에 기여하며 인지도가 높아져 대통령 선거 여론조사에 등장하기 시작했다.[5] 9월에 공식적으로 대통령 선거 운동을 시작한 정몽준은 많은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을 앞질렀으며 이회창과도 근소한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노무현과 정몽준이 모두 출마할 경우 이회창이 쉽게 승리할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두 진영은 힘을 합치기로 결정했다. 11월 24일 리서치앤리서치(Research and Research)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이 승리하며, 정몽준은 후보직을 사퇴하고 노무현을 지지했다.[6]
하지만, 정몽준은 12월 18일 밤 10시 긴급 발표를 통해 민주당과의 선거 공조 파기 및 노무현 후보 지지 철회를 선언하였다. 정몽준은 그날 유세에서 노무현 후보가 ‘미국과 북한과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는 표현을 한 것에 노무현 후보의 외교안보 의식에 문제를 느꼈다고 밝혔다.[37] 노무현 후보와 정대철 민주당 선대위원장 등은 정몽준을 만나기 위해 자택 앞까지 찾아갔으나, 정몽준은 만나주지 않았다.[38]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진보 진영이 권영길 후보 대신 노무현 후보로 결집하는 의외의 효과를 가져왔다는 분석도 있다.[38]
5. 여론 조사
wikitable
날짜 | 이회창 | 노무현 | 정몽준 | 이인제 | 박근혜 | 권영길 | 이한동 | 비고 |
---|---|---|---|---|---|---|---|---|
2001년 12월 11일[39] | style="text-align: left; " 24.4 | style="text-align: left; " 8.9 | style="text-align: left; " 19.6 | |||||
2002년 1월 1일[40] | style="text-align: left; " 31.7 | style="text-align: left; " 8.2 | style="text-align: left; " 16.8 | style="text-align: left; " 8.3 | ||||
2월 11일[41] | style="text-align: left; " 34.5 | style="text-align: left; " 5.8 | style="text-align: left; " 6.7 | style="text-align: left; " 18.5 | style="text-align: left; " 8.8 | 민주당 국민경선 도입 | ||
4월 2일[42] | style="text-align: left; " 27.4 | style="text-align: left; " 28.3 | style="text-align: left; " 7.9 | style="text-align: left; " 13.6 | style="text-align: left; " 6.4 | 민주당 국민경선 중 | ||
5월 2일[43] | style="text-align: left; " 32.9 | style="text-align: left; " 43 | 여야 후보확정 | |||||
5월 13일[44] | style="text-align: left; " 34.7 | style="text-align: left; " 35.3 | style="text-align: left; " 12.9 | 최규선게이트, 미래연합 창당 | ||||
6월 16일[45] | style="text-align: left; " 39.6 | style="text-align: left; " 25.6 | style="text-align: left; " 8.7 | 6.13 지방선거 | ||||
7월 2일[46] | style="text-align: left; " 34.7 | style="text-align: left; " 22.2 | style="text-align: left; " 17.6 | style="text-align: left; " 6.5 | 월드컵 폐막 | |||
8월 11일[47] | style="text-align: left; " 30.8 | style="text-align: left; " 20.8 | style="text-align: left; " 27.4 | 8.8 재보선 | ||||
9월 5일[48] | style="text-align: left; " 30.2 | style="text-align: left; " 17.6 | style="text-align: left; " 29.6 | style="text-align: left; " 1.7 | ||||
10월 8일[49] | style="text-align: left; " 31 | style="text-align: left; " 14.7 | style="text-align: left; " 27.1 | style="text-align: left; " 1.6 | style="text-align: left; " 0.9 | 정몽준 출마선언 | ||
11월 6일[50] | style="text-align: left; " 36 | style="text-align: left; " 16.8 | style="text-align: left; " 22.4 | style="text-align: left; " 2.6 | style="text-align: left; " 0.2 | 민주당 내분 | ||
11월 26일[51] | style="text-align: left; " 35.2 | style="text-align: left; " 42.2 | style="text-align: left; " 2.7 | style="text-align: left; " 0.4 |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 |||
12월 15일[52] | style="text-align: left; " 35.2 | style="text-align: left; " 41.3 | style="text-align: left; " 4.5 |
6. KBS 출구조사
wikitable
출구조사 | 노무현(새천년민주당) | 이회창(한나라당) | 권영길(민주노동당) | 이한동(하나로국민연합) | 김영규(사회당) | 김길수(호국당) |
---|---|---|---|---|---|---|
전국(%) | 49.1 | 46.8 | 3.5 | 0.3 | 0.1 | 0.2 |
서울 | 49.4 | 47.2 | 3.1 | 0.1 | 0.1 | 0.1 |
부산 | 30.4 | 65.9 | 3.5 | 0.1 | 0.0 | 0.1 |
대구 | 19.2 | 77.2 | 3.3 | 0.1 | 0.0 | 0.2 |
인천 | 51.7 | 43.3 | 4.7 | 0.1 | 0.1 | 0.1 |
광주 | 95.9 | 2.9 | 1.0 | 0.1 | 0.0 | 0.1 |
대전 | 55.5 | 39.7 | 4.6 | 0.2 | 0.0 | 0.0 |
울산 | 38.7 | 47.7 | 13.1 | 0.3 | 0.2 | 0.0 |
경기 | 52.1 | 42.4 | 4.8 | 0.5 | 0.1 | 0.1 |
강원 | 40.8 | 53.2 | 5.3 | 0.5 | 0.1 | 0.1 |
충남 | 52.5 | 43.2 | 4.0 | 0.2 | 0.0 | 0.1 |
충북 | 49.3 | 44.9 | 5.1 | 0.3 | 0.2 | 0.2 |
전남 | 95.3 | 3.4 | 0.9 | 0.3 | 0.1 | 0.0 |
전북 | 92.8 | 5.5 | 1.5 | 0.2 | 0.0 | 0.0 |
경남 | 30.6 | 62.7 | 6.2 | 0.2 | 0.1 | 0.2 |
경북 | 23.5 | 70.9 | 5.2 | 0.3 | 0.0 | 0.1 |
제주 | 57.5 | 38.9 | 3.1 | 0.1 | 0.0 | 0.4 |
7. 선거 결과
민주당의 노무현이 2위 이회창에 득표율 2.32%, 득표수로는 57만 표 정도의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 '''투표율''':70.8% (선거인수: 34,991,529 / 총투표자수: 24,784,963)
당락 | 정당 | 후보 | 득표수 | 득표율 |
---|---|---|---|---|
당선 | 새천년민주당 | 노무현 | 12,014,277 | 48.91% |
한나라당 | 이회창 | 11,443,297 | 46.59% | |
민주노동당 | 권영길 | 957,148 | 3.89% | |
하나로국민연합 | 이한동 | 74,027 | 0.30% | |
국태민안호국당 | 김길수 | 51,104 | 0.20% | |
한국사회당 | 김영규 | 22,063 | 0.08% |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는 서울특별시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과 충청도, 전라도 등 10개 광역시·도에서 승리했다. 반면 이회창 후보는 한나라당의 텃밭인 경상도와 강원도 등 6개 광역시·도에서 노무현 후보를 앞섰다. 이 결과, 서부 지역(수도권·충청도·전라도·제주도)과 동부 지역(강원도·경상도)에서 여야 대통령 후보 지지세가 뚜렷하게 갈리는 결과가 나타났다.
지역 | 노무현 | 이회창 | 권영길 | |||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008744;"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0052A4;" | colspan="2" style="background-color:#F3D23B;" | ||||
득표수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
서울 | 2,447,376 | 45.0 | 179,790 | 3.3 | ||
부산 | 587,946 | 29.9 | 61,281 | 3.1 | ||
대구 | 240,745 | 18.7 | 42,174 | 3.3 | ||
인천 | 547,205 | 44.6 | 61,655 | 5.0 | ||
광주 | 26,869 | 3.6 | 7,243 | 1.0 | ||
대전 | 266,760 | 39.8 | 29,728 | 4.4 | ||
울산 | 178,584 | 35.3 | 57,786 | 11.4 | ||
경기 | 2,120,191 | 44.2 | 209,346 | 4.4 | ||
강원 | 316,722 | 41.5 | 38,722 | 5.1 | ||
충북 | 311,044 | 42.9 | 41,731 | 5.8 | ||
충남 | 375,110 | 41.2 | 49,579 | 5.5 | ||
전북 | 65,334 | 6.2 | 14,904 | 1.4 | ||
전남 | 53,074 | 4.6 | 12,215 | 1.1 | ||
경북 | 311,358 | 21.7 | 62,522 | 4.4 | ||
경남 | 434,642 | 27.1 | 79,853 | 5.0 | ||
제주 | 105,744 | 39.6 | 8,619 | 3.3 | ||
합계 | 11,443,297 | 46.6 | 957,148 | 3.9 | ||
한편, 같은 해 6월 지방 선거에서 약진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던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는 노무현, 이회창 두 후보에게 묻히며 전국 평균 4% 미만의 지지율에 그쳤지만, 민주노총의 세력이 강한 울산에서는 10%가 넘는 지지를 얻었다.
7. 1. 지역별 결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는 서울특별시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과 충청도, 전라도 등 10개 광역시·도에서 승리했다. 반면 이회창 후보는 한나라당의 텃밭인 경상도와 강원도 등 6개 광역시·도에서 노무현 후보를 앞섰다. 이 결과, 서부 지역(수도권·충청도·전라도·제주도)과 동부 지역(강원도·경상도)에서 여야 대통령 후보 지지세가 뚜렷하게 갈리는 결과가 나타났다.
지역 | 노무현 | 이회창 | 권영길 | |||
---|---|---|---|---|---|---|
colspan="2" | colspan="2" | colspan="2" | ||||
득표수 | % | 득표수 | % | 득표수 | % | |
서울 | bgcolor="" | | bgcolor="" | | 2,447,376 | 45.0 | 179,790 | 3.3 |
부산 | 587,946 | 29.9 | bgcolor="" | | bgcolor="" | | 61,281 | 3.1 |
대구 | 240,745 | 18.7 | bgcolor="" | | bgcolor="" | | 42,174 | 3.3 |
인천 | bgcolor="" | | bgcolor="" | | 547,205 | 44.6 | 61,655 | 5.0 |
광주 | bgcolor="" | | bgcolor="" | | 26,869 | 3.6 | 7,243 | 1.0 |
대전 | bgcolor="" | | bgcolor="" | | 266,760 | 39.8 | 29,728 | 4.4 |
울산 | 178,584 | 35.3 | bgcolor="" | | bgcolor="" | | 57,786 | 11.4 |
경기 | bgcolor="" | | bgcolor="" | | 2,120,191 | 44.2 | 209,346 | 4.4 |
강원 | 316,722 | 41.5 | bgcolor="" | | bgcolor="" | | 38,722 | 5.1 |
충북 | bgcolor="" | | bgcolor="" | | 311,044 | 42.9 | 41,731 | 5.8 |
충남 | bgcolor="" | | bgcolor="" | | 375,110 | 41.2 | 49,579 | 5.5 |
전북 | bgcolor="" | | bgcolor="" | | 65,334 | 6.2 | 14,904 | 1.4 |
전남 | bgcolor="" | | bgcolor="" | | 53,074 | 4.6 | 12,215 | 1.1 |
경북 | 311,358 | 21.7 | bgcolor="" | | bgcolor="" | | 62,522 | 4.4 |
경남 | 434,642 | 27.1 | bgcolor="" | | bgcolor="" | | 79,853 | 5.0 |
제주 | bgcolor="" | | bgcolor="" | | 105,744 | 39.6 | 8,619 | 3.3 |
합계 | bgcolor="" | | bgcolor="" | | 11,443,297 | 46.6 | 957,148 | 3.9 |
출처: [http://info.nec.go.kr/ 중앙선거관리위원회] |
한편, 같은 해 6월 지방 선거에서 약진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던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는 노무현, 이회창 두 후보에게 묻히며 전국 평균 4% 미만의 지지율에 그쳤지만, 민주노총의 세력이 강한 울산에서는 10%가 넘는 지지를 얻었다.
8. 선거 이후
이 선거는 대한민국 정치를 이끈 3김 시대의 종식과 대한민국 정치계의 본격적인 세대 교체론의 대두와 함께 노사모의 등장 등 인터넷 정치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는 점에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선거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으나, 2007년 전격적으로 정계에 복귀하게 된다.
노무현 후보의 당선으로 새천년민주당은 정권 연장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을 위시한 신주류 소장파와 구주류파가 중심인 민주당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고, 결국 임기 중이던 2003년 9월 30일 노무현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함으로써 민주당은 야당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후 새천년민주당은 2004년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키지만, 오히려 민심의 역풍을 맞고 총선에서 참패하며 몰락하고 만다.
열린우리당은 탄핵 역풍의 수혜를 맞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압승, 192석을 차지하며 여대야소 구도를 이루게 된다.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 기각 6일 뒤인 2004년 5월 20일 열린우리당에 공식적으로 입당하였다.
반면 제1야당 한나라당은 선거에서 패배하며 정권 교체를 실패하며 계속 야당 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회창 은퇴와 참여정부의 출범 이후 원내 의석수를 악용해 압박하여 참여정부에게 향한 견제를 하기 시작했지만, 2003년 11월 한나라당이 대기업들부터 선거 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으로 인해 16대 대선 차떼기 사건으로 역풍을 맞게 되고 한나라당은 창당 이래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2004년 3월 17대 총선을 한 달 앞두고 제2야당 새천년민주당, 소수 야당 자민련과의 공조하여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일으켜 민심의 역풍을 맞게 되었지만, 17대 총선에서 16년 만에 원내 1당 지위를 상실했지만 개헌 저지선 100석 이상 사수를 하며 선전하는데 만족했다. 이회창 은퇴와 한나라당의 실질적 뿌리 민정계 인사들의 퇴장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차녀 박근혜 대표와 이명박 서울시장의 등장으로 친박계와 친이계라는 거대한 파벌이 등장했다. 이후 두 사람은 17대 대선과 18대 대선에서 나란히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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